제주살이

[스크랩] 제주4.3 희생자 위령비를 보면서

환희의정원 2013. 4. 1. 23:29

중문 천제연 공원에는 '제주4.3 중문면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2008년도에 4.3희생자 중문유족회에서 세운 위령비로

제주4.3사건으로 희생된 중문면 출신 786위 영령들이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제주의 어느 마을에서도 4.3사건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있지만,

이 위령비에 의하면 중문지역에서도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한 후,

1948년 11월 15일 중문마을에 무장대가 습격하여 면사무소 등에 방화하여 주변일대가 불바다가 되는 등

중문면 12개 자연마을마다 크고 작은 무장대의 습격과 약탈이 자행되었다"고 써있다.   

 

 

그 후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토벌군 등에 의하여 해안선 5km이상 중산간 지대 소개령과 함께 중산간 마을 초토화 작전이 개시되었고

"1954년 9월까지 6년 6개월간 무장대와 토벌대간 무력 충돌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 13,564명이 무참하게 희생되었다."

여기에서 '희생자의 78% 상당이 토벌대의 국가 공권력의 남용에 의하여 희생되었다."고 한다.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에는 "당시 희생자 수를 정확히 알 수가 없으며

잠정적으로 4.3사건 인명피해를 25,000 ~ 30,00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당시 제주도의 인구가 대략 30만명인것을 감안한다면

무려 제주도민의 10%상당이 희생된 너무나 안타깝고 불행한 우리의 슬픈 현대사인 것이다.  

 

나는 코흘리게 어릴적부터 할아버지나 어른들이 4.3사건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을 들으며 자랐으므로

낮에는 토벌대에 밤에는 무장대에 시달리면서 고난을 헤쳐온 불행한 우리 조상들이 삶을 약간은 이해할 수있었다.

 

그러나 최근 4.3사건에 대하여 

다른 지방사람들이 우리 제주민보다 더 잘아는 것처럼 평가하고 단죄하는 것을 자주 보게된다.

어디에서 4.3에 관한 이야기 책 한권쯤 읽어 보았던지

아니면 4.3을 주제로하는 영화 두어편 본 것만으로 제주의 4.3을 다아는 것처럼 행동하려한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말하고 싶다.

제주의 4.3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미군정에 반대하기 위한 봉기"와 "토벌군에 의한 학살" 등

모든 것을 이분법에 의하여 단순하게 생각하며 우리 조상들을 단죄하지 말아 달라고.

 

 

그 당시 우리 조상들인 제주민들은 무엇을 먹고, 어떤일을 하면서 살았는지 생각해봐야한다.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60년대에 나는 고무신이 떨어지면 맨발로 친구들과 놀러 다녔다.

보리쌀이 없어 하루 한끼는 굶다시피 했으며, 가을에서 봄까지는 무조건 고구마로 한끼를 때워야 했다.

어쩌다 새마을 사업에 동원되는 날엔 미국에서 소들이 먹던 강냉이를 나눠주었고 보리밥에 섞어서 맛있게 먹었다.

그 당시 우리는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만을 생각하며 보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보다 20여년도 더 오랜 4.3사건 당시 우리 부모님들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개백년(갑인년)" 흉년엔 풀뿌리를 먹었고, 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너무 힘든 세상이었다.

좌우익 사상이 어디 있으며, 미군정이 무엇이고, 부정선거가 어떤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알수도 없었다.

6.25전쟁 때에도 우리 동네에 라디오가 한 대도 없었다고 하는데 무엇으로 듣고 어떻게 알았겠는가.  

  

 

 

우리 동네 어른들에 의하면

4.3사건때 내 고향 위미리에는 두 번에 걸친 무장대의 습격이 있었다고한다.

그리고 무장대에 의해 주민 십수명이 죽창에 찔려 죽었으며 마을가옥 100여채가 전부 불타기도 했다.

습격을 당한 날 밤은 바닷가 암벽 동굴에 숨어서 목숨을 부지했던 우리 부모와 친척들이 있는 반면에

무장대에 의해 집이 불타는데도 고구마를 약탈해 갈까봐 감추다가 걸려 죽창에 찔려 죽은 친지도 있다.

 

 

그리고 더 아이러니 한 것은 "당시에 밭구석에 숨어 있던 사람은

무장대들이 죽창으로 친지를 찔러 죽이는 그 장면을 목격하였고,

당시 그 자리에 있던 무장대가 이웃마을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고 말하는 것도 들었다.

 

그리고 군경토벌대가 중산간 마을을 습격할 때면 우리 동네 사람들도 우마차를 끌고 동원되었고,

산속에 숨어버린 텅빈 마을로 가서 곡식과 살림살이들을 약탈하여 마차에 싣고 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때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불의이며, 누가 옳고 누가 그른것인가?

 

그 당시 제주도의 해안마을 쪽에는 토벌대들이, 중산간 마을 쪽에는 무장대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고,

제주도민들은 아무것도 모른체 낮과 밤이 다른 눈치를 보다가 토벌대나 무장대에 의해 무참하게 죽어갔을 뿐이었다.   

 

 

 

 

내가 어릴적에 할아버지들로 부터 들은 4.3사건에 얽힌 이야기들은 이 외에도 많이있다.

무장대들이 습격을 방지하기 위하여 마을 전체를 돌을 이용하여 2m50정도의 높이 성담을 쌓아놓았고

밤이되면 마을 주민 전체가 순번을 매겨 보초를 서다가 창에 찔려 죽은 이야기하며

농번기 때는 성담밖으로 경찰과 함께 나가서 일을 하기도 했고,

서북청년단들이 마을주민들을 집합시켜 몽둥이로 빠따를 쳤다고도 했다.

 

이러한 제주 4.3의 모든 사연들을 지금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말도 안되는 일일 것이다.

그 당시 정의가 지금의 정의가 될 수 없듯이, 

현재의 정의가 역사 앞에서는 불의가 될지도 모른다.

 

 

제주4.3사건 당시

죽창으로 주민을 찔러 죽인 무장대나

양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토벌대나

우리 마을에 습격해서 마을 전체를 불태워버린 이웃 동네 사람들이나

토벌대를 따라 마차까지 끌고가서 살림살이를 약탈해온 우리 동네 사람들이나

이제와서 무엇을 기준으로 누구의 잘잘못을 어떻게 가려내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히틀러 당시에는 국가적인 정의의 이름으로 유태인을 학살하였고,

2천년 전에는 군중들에 정의에 의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되새기고 지켜보면서 

예수님께서도 사랑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다시 부활하셨드시

제주 4.3사건 역시 '화해와 상생'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강우일 주교님이 2013년 부활절 사목서한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오늘 우리에게도 부활이란 세상을 불의에서 정의로, 불공정에서 공정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탈출하게 하는 여정이 아니겠습니까?'' 

 

출처 : 에뜨랑제(Etranger)나그네의 길
글쓴이 : 오충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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