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 반에 시작한 수업은 12시까지 쉼없이 이어지고 수업을 마친 난 허물벗듯 생계의 현장을 벗고 소년
원으로 내달린다. 버스 한 대를 놓치게 되면 8분 정도의 시간이 연착되고 늦어진 8분은 다시 전철 한 대를 놓
칠 수도 있게 한다. 내가 타야 하는 전철의 배차 간격은 보통 8분에서 12분. 아슬아슬하게 놓친 전철은 다음에
갈아탈 전철을 또 놓칠 수 있게 하고. 종국엔 최종 목적지에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당도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난 차 한대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렇게 죽자고 달리는 셈이다. 평일이라면 그러겠거니 하지만 남들이 쉬는 토
요일의 일상이 그렇다.
물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생업이고 소년원 아이들과 함께 하는 건 봉사활동이니 누가 봐도 좋은 일을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혼이 쏙 빠지게 내달리다 보면 내가 바로 버팔로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무리지어 생활하는 버팔로(들소)는 놀랐을 때 고개를 아래로 숙인 채 무조건 앞으로 달려나가는 습성이 있다.
이를 이용해 인디언들은 앞서가는 몇몇 버팔로를 놀라게 해 절벽 방향으로 유인한다. 그러면 그들은 앞서가는
동료의 뒤 꽁무니만 바라보며 내달리다 스스로 절벽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고 한다.
비슷한 예는 또 있다. 터키 동부의 한 작은 마을에서 양떼들이 한꺼번에 절벽 아래로 뛰어들어 떼죽음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해 농민들을 시름에 잠기게 했다. 양치기들이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잠시 양떼들을 떠나 있던 사이
목초지에서 풀을 뜯던 양들 가운데 한 마리가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자 주변에 있던 500여 마리의 양들이 일제
히 뒤따라 벽으로 곤두박질쳤다. 이 사고로 인해 죽은 양들은 450마리나 되었다고 한다. 그 중 살아날 수 있었
던 50마리의 양들은 먼저 떨어진 양들이 완충작용을 해주는 바람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그들의 습성 때문이지만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모른 채 앞으로 내달리기만 하는 사람들에
게 날리는 경고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력이 좋지 않은 들소나 양떼는 무리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바로 앞
동료의 뒤를 바짝 뒤쫓아 가는데 앞에 가던 동료가 화들짝 놀라 달리기라도 하면 뒤따라오던 모든 무리들은 영
문도 모른 채 무조건 앞으로 앞으로 내달린다. 그러다 보면 집단 추락사를 당하기도 한다.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 겨우겨우 전철을 탔는데 기관사가 나직나직한 음성으로 버팔로 얘기를 들려줬다. 그러
면서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정말 난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내 영혼은 과연 나를 잘 따라오고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교회인 <순례자의 교회>
제주시 한경면 용수저수지 인근 8㎡ 규모인 이 교회는 대여섯 명이 들어가면 꽉 찰만큼 아주 작은 교회이다.
독일에 사는 친구에게서 편지가 왔다.
"기자단 자격으로 한국에 가는데 이번에는 너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나의 삶이 어떤지 소상히 아는 친구는 한 번도 많은 시간을 내달라며 조른 적도 없고 넉넉한 시간을 내어 주지
않은 것에 대해 원망하거나 불평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넌즈시 나의 뜻을 물은 게 아니라 단도직입적
으로 잘라 통보했다.
"너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난 친구의 바람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친구가 원하는 날에, 친구가 원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낸 다음, 친구가
나와 함께 가고 싶다는 제주행 티켓을 끊은 것이다. 친구는 얼마 전 항암을 마친 상태다. 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더 이상 어떤 것도 묻거나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길 위에 섰다.
올레길에서의 파란색 화살표시는 순방향(진행방향)을 의미하고 노란색 화살표시는 역방향을 의미한다.
표식을 못하는 숲길이나 산길에서는 리본을 달아 놓는다.
첫날 일정은 새벽 5시 반부터 시작되었다. 제주를 제주 사람보다 더 빤히 아는 또 다른 친구의 도움으로 신새벽부터
길을 나섰다. 6시면 떠오르는 아침해를 보기 위해서였다. 우리 일행 밖에 없는 용머리해변의 일출 광경은 과연 경이
롭고 신비로웠다.
아침을 먹고 작은 시골 공소에서 미사를 드린 다음 곶장 화순곶자왈로 향했다.
화순 곶자왈 입구에 써 있던 시 한 편에 부르르 영혼에 울림이 인다.
오를 때 보지 못한 꽃이 내려올 때 보였다네! 우린 늘 어딘가로 오르기 위해 발버둥치다 꼭 봐야 할 것들을 흘려
보낼 때가 얼마나 많은가. 조화롭게 살아가는 수많은 나무와 풀들의 질서 앞에 잠시 머무른다.
숲에도 질서가 있다.
더 먼저 꽃을 내고 잎이 돋는 것이 있고 좀 더 여유있게 피어나는 것들이 있다.
빛이 어떻게 비치고, 얼마만큼 비치느냐에 따라 질서가 달라지고 숲의 모습이 변한다.
봄이 되면 땅에 있는 작은 꽃들이 먼저 피어난다.
태양과 가까이 있는 키 큰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데
어떻게 땅바닥의 작은 야생화까지 빛이 전달되어 먼저 피어날 수 있을까?
자세히 보면 키 큰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로 늦은 봄까지 서서
햇볕이 땅에까지 떨어지도록 하여 가장 키가 작은 야생화가 먼저 꽃을 피운다.
그 다음은 작은 나무들 차례로 빛을 많이 받기 위해 넓은 잎이 돋아난다.
바람따라 살랑살랑 움직여주는 나뭇가지들 사이로 땅에 사는 식물들과 작은 나무들이
햇볕을 실컷 먹고 잘 자랄 수 있다. 이것이 숲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곶자왈'은 '원시림'을 의미하는 제주 사투리인데 제주를 살게 하는 허파이다.
곶자왈을 빠져나온 우리는 올레 10코스를 걸었다. 시원하게 펼쳐진 형제해안로를 따라 걷는데 이상한 동굴들이
보였다. 그것도 한 두개가 아니다.
송악산 외부 능선 해산에 있는 이 시설물은 당시 일본군의 군사시설로 1943-1945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송악산
에는 이와 같은 동굴진지가 60여개소나 되며 이 진지동굴은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저
항기지로 삼고자 했던 증거물이다.
송악산 풍경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아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던 송악산 분화구
여행길에 좀처럼 사진을 찍지 않는 사람인데 특별한 의미가 담긴 여행이라 친구와 인증샷을 남겼다.
항암치료를 마친 친구의 머리카락은 아직도 다 자라지 않아 남자처럼 보인다.
이틀 째의 일정은 올레 14-1코스인 오설록에서 청수곶자왈을 거쳐 13코스 시작인 용수포구와 저지리 일대를 걸
었다. 세 명 모두 워낙 걷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열 세 시간의 강행군에도 지칠 줄 몰랐다.
녹차에도 꽃이 핀다는 걸 처음 알았다. 10월의 끝자락이었지만 꽃들은 이렇게 환한 얼굴로 길손을 맞아주었다.
끝없이 이어지던 오설록 차밭
다시 곶자왈이다.
우린 사람이 없는 한적한 길만 찾아 걸었다. 그중 화순 곶자왈과 청수 곶자왈은 우리가 독차지했다.
곶자왈을 빠져나온 우리는 예술가 마을이라는 저지리마을과 저지오름을 걸었다.
제주 최초의 무인카페인 오월의 꽃
눈꽃처럼 하얀 벽 한 귀퉁이에 길손들이 남기고 간 메모가 빼곡히 꽂혀 있다.
우리 역시 차를 마시며 흔적을 남겼다.
우리,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
메모를 꽂고 돌아서는 내게 친구가 묻는다.
"뭐라고 썼어?"
난 차마 내가 썼던 내용을 친구에게 들려주지 못했다.
우린 정말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까?
저지오름 입구
저지오름은 2007년 제 8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생명상(대상)을 받았다.
오후 5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각인데도 사위가 캄캄하다. 그만큼 숲이 우거져 있다는 말이다.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것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과연 저지오름이다!
저지오름 정상에 오르자 멀리 죽은 이들의 땅이 보인다. 생명을 찾아 오른 오름에서 죽음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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