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이야기

영성 수련회(2014년 2월18-21일)

환희의정원 2014. 2. 22. 02:44

 

산방산이 보이는 교회에서

영성 수련회가 있었다

지난 해 11월에 계획을 잡았었는데

뜻하지 않게 강사님의 건강상의 이유로 2월 로 미루워져

3박4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 가셨다.

믿음의 가치관이 흔들리며

무언가의 쫏기듯 살아가는 내게 브레이크가 걸린듯

며칠이 침묵 아닌 침묵속에 지난 시간이였다

첫째날에 강사 목사님의 인삿말과 설교에

잠자고 있던 내영혼의 불씨가 살아 나는듯

평안을 느끼며..  

 

기념 사진을 찍으며

일일이 이름을 불러주시고 대화 하듯

한사람 한사람에게 적절한 성경구절로

이야기 하듯 말씀을 주셨다

내게 주신 말씀도 요한복음 (20;19-20)

말씀으로 의심많은 도마처럼 확신이 서지않는 나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란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듯 마음의 평안을 얻고

이번 영성 수련회를 은혜가운데 마칠수 있어 감사를 드리며 .. 

 

이번 수련회에서  마지막날 "때제 기도회"란 걸 알게 되었다

 

장경선 수사님을 초빙하여

때제기도회를 갖었는데

그뜻은 알수 없으나  설교가 없는 반복되는 음악과 함께 묵상 하며

얻어지는 평안함을 체험 하게되며

 

카돌릭과 유사한 평화와 기쁨을 느낄수 있어  큰 은혜의 시간 이었다

이번기회에 때제기도회가 프랑스 어느 작은 마을에서

오랜 전통으로 교파를 초월한 신앙 공동체 생활에서

사랑 안에서 카돌릭과 개신교가 만나는

때제 기도회가 내가 바라던 교회의 역활인거 같아 많은 공감을

갖게되었다

 

이 수련회를 통하여 18년간 그나라 공동체를 설립하신

강사 귀인 목사님을 만나게 된거 같아

"그나라 공동체'윤공부 목사님의  

업적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았다

 

아래 내용은 펌해온 글입니다

 

거리의 아이들 끌어안고 영성 나누며 더불어 살기

윤공부 목사님.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화대2리 시골길이 끝날 즈음에 그나라공동체가 있다.

두 남자 아이들이 탁구를 친다.

공이 몇 번이고 왔다갔다하는 것을 보니 제법이다.

재민(19)이와 희주(14)다. 점심 시간이다. 식당으로 가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밥과 반찬을 식판에 담아 앉는다.

희주가 “재민이 형 속은 정말 깊다”고 한다.

재민이는 “내가 아무리 속이 깊어도, 사모님 깊은 속을 따라갈 수 있겠느냐”고 한다.

윤공부(60) 목사와 다른 가족들이 폭소를 터트린다.

서로 뱃속이 깊어서 밥이 많이 들어간다고 농담을 한 것이다.

식사가 끝날 무렵 다혜가 윤 목사 앞으로 와 머리를 긁적인다.

용돈을 벌기 위해 공동체 안 비닐하우스에 차린 ‘간이 찻집’에 커피가 떨어져 사러가는데,

 “목사님이 운전해 달라”는 것이다. 윤 목사가 “그러마”고 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활짝 웃는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늘 문제아 취급을 당하고, 때론 소년원과 밤길을 전전하다

이곳에 온 아이들은 “목사님은 우리 편”이라며 어리광을 피운다.

이들 7명은 공동체 안에 있는 ‘참나무청소년배움터’에서 대안 교육을 받고 있다.

윤 목사와 김은숙 사모와 봉사자들의 사랑 속에서 아이들의 그늘진 얼굴은 활짝 개어 햇살이 빛난다.

40살에 서울 대치동에서 예린교회를 개척했던 윤 목사는

개척 10주년을 앞둔 90년 영적 갈증을 채우려고 부시맨의 고향인 아프리카 모추아나로 떠났다.

유럽배낭여행을 거쳐 9개월 뒤 ‘분수처럼 솟아오른 사랑’을 느끼며

귀국한 그는 공동체적 삶을 실천하기로 하고, 20평에 불과한 연립주택을 ‘산 자의 집’으로 이름짓고,

‘거리의 아이들’을 들였다. 부인과 당시 고 3이던 큰아들 용희(29)와 태일(27)이 가족회의에서

‘헌신하는 삶’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뒤 이루 말로 다하기 어려운 일이 닥쳤다.

자기들끼리 동네에 다니면서 각목을 휘두르며 싸우고, 한 아이는 오토바이 사고로 숨졌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들어왔던 민성이는 교통사고로 누워 한 달 동안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다.

그렇게 5년간 들어왔다 나갔다 하며 거쳐간 아이들이 72명이었다.

아이들을 검정고시 학원에 보냈던 윤 목사는 아이들의 심성을 되찾아 줄 ‘영성교육’을 할 환경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마침내 오랜 서울살이를 접고 97년 4월 포천행을 결행했다.

이곳에 들어와 함께 살며 배움터에서 공부했던 학생만 55명이나 됐다.

아이들은 배움터에서 공부도 하고, 농삿일도 하고, 여행도 하면서 변화되어 갔지만,

오랜 습관을 바꾸지 못하고 다시 나가곤 했다.

7년 동안 함께 했던 민성이가 얼마 전 나갔을 때 윤 목사는 깊은 아픔을 느끼기도 했다.

새로운 삶을 시도하며 이렇게 가슴이 멍들기도 했던 윤 목사는 지난해 부인과 함께

90여일간 인도의 수도원 ‘참새의 둥우리’ 등에서 영성을 체험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더 이상 여행에 대한 갈증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민성이도 자신처럼 ‘나를 찾아’ 떠났다고 믿고 있다.

이런 진통 속에서도 이제 탈북자들도 받아들여 ‘함께 하는 삶’을 꿈꾸는 윤 목사의 얼굴이 배움터의 10대 아이들만큼이나 밝다.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한 아들 용희도 이 아이들과의 삶에 동참했다.

배움터의 아이들은 윤 목사로 인해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고, 그는 그 아이들로 인해 하나님의 은총으로 빛난다. ‘

함께 하는 삶’이 은총을 배가시키고 있다. (031)536-2208.

조연현 기자 

프랑스 떼제와 한국 떼제

 

    떼제 문패


   떼제공동체는 프랑스에서 시작됐다. 떼제(Taize)는 프랑스 남동부 리용에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조그만 시골마을 이름이다.


   떼제공동체를 처음 시작한 로제 수사는 어린 시절 개신교 목사인 아버지가 가톨릭 교회에서 기도하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학창시절 가톨릭 가정에서 하숙을 하면서 교파를 넘어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데 생각을 모으게 됐다. 또,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의 화해를 구체적으로 이루어가는 봉헌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제2차세계대전이 유럽을 휩쓸던 1940년, 스물다섯 살의 신학생이던 로제가 작은 농촌마을인 떼제에 정착해 나치를 피해온 유대인들을 숨겨 준 것이 공동체의 시작이다.


   1949년 부활절에 로제 수사는 6명의 형제와 함께 평생을 수도생활에 바치기로 서원했다. 현재 떼제공동체는 개신교와 가톨릭 등 여러 교파의 기독교인들로 이뤄져 있는데 전 세계 30여개 나라에서 온 100여 명의 수사들이 있다. 물론 한국인도 있다.


   교회와 신자들은 구체적인 인간 역사와 상황 속에 살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는 로제 수사의 신념에 따라 떼제는 전 세계의 고통 받는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수사들을 파견하고 있다.

 한국에는 1979년 김수환 추기경의 요청으로 들어왔다. 떼제 수사들이 한국에 왔을 때 김수환 추기경은 서울 화곡동에 있는 수도원 건물을 내어 주었고, 떼제 수사들은 지금도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쉬 이단으로 정죄하는 한국의 개신교. 거대한 틀 안에서 내용보다는 형식이 주는 웅장함으로 자리매김 되어버린 가톨릭.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는 사실을 떼제는 말한다. “그리스도가 2천 년 전 오신 이유가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과의 친교를 베풀어주시러 오셨다는 사실”을 떼제를 통해 로제수사는 말한다. 노래와 침묵을 통해 하나님과의 친교를, 종교를 넘어서는 우정을 경험하는 곳 떼제. 내가 아닌 남을 위해 기도하는 곳 떼제. 개인적인 유산 없이 돈도 나누고 시간도 나누고, 고민도 나누며 봉사하는 삶에 온전히 헌신된 떼제의 수사님들이 있는 수도공동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진리를 충실히 삶 속에 담아내며 쉼 없는 기도와 일치의 샘이 되고 있는 떼제가 한국에도 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