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스크랩] 제주의 가난했던 시절

환희의정원 2014. 7. 23. 10:56

요즘 페이스북 '유니세프'를 통해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나는 그 그림들을 보면서 비록 가난했지만 슬프지 않았던

우리 제주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곤 한다.

 

 

제주는 가난했던 유배의 땅이었다.

 

삼성혈의 신화로 제주가 독립되었던 시기는 옛날 이야기일 뿐,

고려초에 점령되고 난 후에는 유배지로 슬픈 역사를 갖고 있을 뿐 만아니라

조정에의해서 제주인은 육지로 나갈 수 없도록 출육금지령까지 내려졌던 제주였다. 

 

그래서 20세기초에 신축교안(이재수의 난)으로 수 백명이 학살되었고

일제 점령기를 거쳐 20세기 중반 4.3사건으로 수 만명이 희생을 당했어도

변방의 사건으로 위정자나 국민들이 관심을 주지도 않았다.    

 

<대동여 지도의 제주도>

 

역설적으로 제주도가 국가적으로 필요했을 때는 6.25전쟁이었다.

 

인구 겨우 30여만명인 제주에 10여만명의 피난민들이 몰려들었으며

모슬포 제1훈련소는 물론 육지부에서 학교와 주요 인사들이 제주에 피난왔다.

 

이 들은 전쟁의 시기를 보내면서 제주의 구석 구석을 둘러보았고,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잠재되어 있는 제주도의 가치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제주민들은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바람과 돌이 많은 척박한 농토에서는 생산되는 보리와 고구마가 주식이었으며,

우리의 어린시절인 1960년대에도 말 그대로 원시적인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래 사진은 밭에서 검질을 메다가(잡초 제거) 점심을 먹는 장면인데

 '차롱'(대나무로 만든 바구니)에서 보리밥을 함께 먹고있다.

 

여름철 보리밥이 쉬지 않도록 '차롱'에 담아 나무에 메달아 두었던 것이다.

사진에는 반찬도 보이지 않는데 당시에는 물외(오이)와 된장, 자리젖 정도가 주 반찬이었다.

 

제주에 산업이 발달하지 못한데에는 물 부족이 있었다.

 

바닷가에서 솟아나는 용천수 '고망물'이나

냇가 바위에 빗물이 고이는 '토강물'이 식수원이었고

비올 때 나무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짚을 이용하여 물항에 모아 먹기도 했다.

 

여자들은 하루에도 여러번 '물허벅'으로 물을 길어와 물항(물항아리)에 담았다.

 

그래서 집집마다 물항과 물을 떠 먹는 '콕박'(박으로 만든 물그릇)이 있고

밤중에 물을 마시려면 컴컴한 '정제(부엌)'에서 더듬 거리며 물을 마시곤 했다.

 

오래된 물항에는 '고노리'라고 부르는 모기 유충이 살기도 하였다.

 

 

제주의 마을은 물이 있는 해안가를 중심으로 발달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마을에는 우물을 파기도 했다.

 

우리 동네 우물은 해안에서 200여m쯤 떨어져 있는데

깊이가 10m 정도로 두레박으로 물을 떠서 허벅에 길었고,

 

잔치집이나 상가에서는 물을 많이 쓰기 때문에

동네 아낙들이 모두 함께 허벅에 물을 길어 물항에 담아두어야 했다.

 

당시 1960년대 중반 우리 동네는 집집마다 소를 키워 30여마리가 있었다.

 

그런데 봄부터 가을까지는 소를 합동으로 돌봐야 했기에,

어린날 국민학교시절에는 학교를 결석하면서 쇠테우리를 가야했다.

 

 소주인 2명이 보름에 한 번씩  순차적으로 쇠테우리를 가는데,

그 몫은 초등학교 아이들이 담당해야했다.

 

 

위 사진에서 처럼 제주의 오름은 나무가 없는 민둥오름이었다.

 

최근들어 힐링으로 유명해진 사려니 오름을 비롯하여

서귀포지역의 고근산, 솔오름, 망오름, 고리오름, 넉구리오름에도 나무는 없었다. 

 

그러다 60년대 새마을 사업과 산림녹화 운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봄이되면 집집마다 마을마다 학교마다 오름에 올라가 나무를 심었는데

당시 심었던 소낭과 측백낭들이 자라서 지금은 오름에 나무들이 가득하게 된것이다.

 

당시에는 국민학교에서 나무 묘목을 나누어 주어 집에가서 심도록 했으며

반별로 가구당 수백그루의 묘목을 할당하여 동네에서 합동으로 나무심는 날을 마련하기도 했다.  

 

 

위 사진은 서귀포에 있는 정방폭포이다.

절벽위에 나무가 하나도 없으며 감저공장(고구마 전분공장) 건물이 보인다.

저기 소남머리에는 소나무가 약간 있으나 삼매봉에도 나무들이 거이 없다.

 

60년대에는 이렇게 수려한 풍광의 절벽위에 감저공장을 지었고

정방폭포로 내려가는 정모시 물을 이용하여

 '감저주시(전분박)'을 바다로 흘러 보내기도 했다.

 

당시에는 하루를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했을 뿐

자연이나 환경에 대하여는 전혀 생각할 수가 없었던 시기였다.  

 

위 사진은 서귀포항에 있었던 고래공장 사진이다.

 

지금은 여기에 대국해저 잠수함과 새연교의 아름다음을 뽐내고 있지만,

60년대 초에만 해도 서귀포항에 고래공장이 가동되었고

지금의 천지연 주차장에는 벼농사를 지었으며 하천에서 장어도 낚았었다.

 

그나마 나무가 하나도 없었던 새섬까지 방파제는 이어져 있었다. 

 

 

6.25전쟁이 끝난 50년대 말에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도 순시 장면이다.

 

배경으로 보건데 대정읍 상모리 부근으로 비포장도로에 짚차를 타고 있으며

작물은 고구마로 보이고 갈중이를 입은 사람이 대통령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1960년대 제주의 일주도로는 비포장도로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도로포장을 지시하여 2년여만에 완공되었으며

대통령이 일주도로를 순시하는데 환영 인파에 동원되었던 기억이 있다.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마을 안길을 포장하였는데

마을 주민 모두가 노력에 동원되었으며 이를 근로의 의무라고 불렀던것 같다.

 

보통은 집집마다 30m정도 담당하여 돌을 이용하여 촘촘하게 기초를 깔았으며,

그 위에 시멘트를 이용하여 도로를 포장을 했다.

 

이러한 노력에 동원되면 하루에 밀가루 한 포대씩 배급을 받아

밀가루로 수제비나 상외떡(진빵의 일종)을 만들어 먹었다.

 

위 사진은 제주의 장례식 장면이다.

 

동네별로 3~40여 가구 정도 모여 '사상접'(장례를 치루기 위한 친목계)을 만들었으며,

그리고 계원의 존비속에 장례가 나면 염에서 부터 무덤까지 장례를 처리해 주었다.

마치 지금의 장의사나 상조보험회사에서 하는 일을 해주는 친목계였다.

 

장례식날에는 사상접원들이 3교대로 상여를 메고 갔는데,

상여를 메는데는 한 번에 15명 정도가 필요했으며 묘지까지 3~5km로 2시간 정도 걸렸다.  

그리고 흙과 잔디로 무덤을 만드는 일도 사상접원들이 몫이었다.

 

제주는 신이 많으며 굿도 자주했는데 위는 큰 굿을 하는 사진이다.

 

당시 제주에는 마을마다 '신방'이라고 불렀던 무당들이 있었으며

장례식 후에는 '귀양을 낸다'고 말하는 3일에 걸치는 큰 굿을 한 번씩 하게 되는데

아마도 이승에서 못다한 한을 다 풀고 편안히 저승으로 가라는 의미의 굿인것 같았다.

 

굿을 하는 집에는 대나무를 세우고 한지를 이용한 각종 부적들이 주렁이고

징과 장구를 이용하여 덩덩거리며 신방은 춤을 추기도하였다.

 

위는 제주의 구덕(대바구니)이다.

대나무를 이용하여 만든 바구니인데 쓰임새가 아주 많았다.

 

촐레(반찬)을 보관하는 냉장고 역할에서부터 바당에서 고매기를 잡을 때도 썼다.

이 대바구니에 종이를 붙이면 '보름구덕'이 되어 작은 장농으로 쓰였고

좀 더 길쭉하게 만들어 '애기구덕'(아기 침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제주의 풍선(고기잡이 배)이다.

제주의 해안가에 있는 모든 마을에는 개맛(작은 포구)이 있는데

그 개맛에는 대여섯척의 풍선과 테우(뎃목)가 몇 개 있다.

 

이 배에는 '배임제'(선주)를 비롯하여 3~5명이 선원이 있으며

마을 앞 연안에서 갈치를 낚고 그물로 자리를 잡기도하였다. 

 

제주의 솔라니(옥돔)는 풍선으로 6시간 정도 걸리는 먼 바다에서 잡히는데

솔라니 잡이는 보통 1박2일이 걸렸으며 조기들도 함께 잡았다.  

 

<주강현의'제주기행'을 읽다가 대단한 사진이 있어 빌려왔습니다>

 

내가 1971년 5월 한라산 철쭉제 등반했을 때 보았던 광경과 비슷하다.

 

한라산 백록담에는 물이 반쯤 차있었고 백록담 안에 천여명이 등반객들이 몰렸었다.

그리고 백록담 안에서 철쭉아가씨 선발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사진은 바로 철쭉아가씨 선발대회 풍경으로 보인다.

 

<그리고 제주의 옛날을 회상하게 만드는 이 블로그의 다른 사진들은

 제주도에서 발행한 제주의 역사 사진첩에서 빌려왔으므로  혹시 문제가 있으면 연락바랍니다.>

출처 : 에뜨랑제(Etranger)나그네의 길
글쓴이 : 나그네 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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