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요르단 여행

요르단 페트라 유적지

환희의정원 2019. 2. 1. 05:37

검색해서 옮겨온글 입니다

 

사해와 아카바만(灣) 중간에 위치한 페트라는 기원전 400년경에 아라비아반도에 정착한 유목민족 나바테아인의 종교적 중심지이자 수도였다. 페트라를
건설한 나바테아인들은 고대 사회에서 인기가 높았던 알로에 · 계피 · 유향 등을 남아라비아와 인도에서 지중해 지역으로 운반했고 기원전 4세기부터
전설적인 유향로(乳香路)의 북부를 장악할 정도로 그 세력이 컸다. 척박한 지역이었지만 물이 있는 장소를 알고 사막의 모래바람을 피하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BR><BR>해발 950미터에 위치한 은닉처 페트라는 그 주위로 높고 가파른 암벽들이 어두운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어서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에 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했다. 로마도 무력으로는 페트라(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를 정복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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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테아인들은 지중해 연안까지 여러 대상로를 장악했는데 그중에는 모세와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 땅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향하면서 지났다고 하는
‘왕의 길’도 있다. 대상들은 페트라를 통해 이집트의 기자 · 지중해 · 시리아 등으로 여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페트라 도시민들은 통행요금
징수와 아스팔트 무역의 수입으로 아주 부유했다.<BR><BR>페트라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 사이에 전성기를 누렸는데 당시 페트라의

 

인구는 3만 명을 넘었다. 페트라는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포장도로 · 목욕탕 · 상점 · 극장 · 장터 · 궁전 · 체육관 · 계단식 정원
· 테라코타로 만든 정교한 배수시설 등을 갖추고 있었다.<BR><BR>페트라에서는 골짜기가 워낙 좁아 큰 규모의 건물을 세울 수 없었다. 그래서
도시민들은 그들이 받들던 신 · 망자들과 함께 바위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바위를 깎아 무덤과 주거지를 만든 것이다. 다행히도 페트라의
암석은 파거나 조각하기 쉬운 사암이었다. 현재까지 페트라에서는 800개의 주거지와 무덤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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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페트라 마치며